명제에서 동등한 근거가 성립하면서 양립할 수 없는, 참과 거짓이 계속 양립하는 것을 이율배반(二律背反)이라고 한다. 어떤 이가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자 이런 예를 들었다.
식인종이 사는 섬에 잡혀온 사람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하게 한다. 마지막 말 한마디가 거짓이면 바다에 던져져 상어 밥이 되고, 참이면 식인종의 저녁 식사거리가 된다고 가정했을 때, 그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답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상어 밥도 안 되고 식인종의 저녁 식사 재료도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글쓴이는 그 해답으로 "나는 거짓만을 말한다."를 들었다.
식인종 앞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마지막으로 한 이 말, "나는 거짓만을 말한다."가 참이면, 그는 거짓만 말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고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가 결론이 나는 것은 아니다. 내뱉은 말은 분명히 참이고, 따라서 거짓만을 말한다는 그의 말 자체가 참이라면 그는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참도 거짓도 아니다. 이 말이 거짓이라 해도 역시나, 그는 거짓만 말하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말처럼 그 말 자체마저도 거짓으로 말한 것이니 말 자체는 참이 되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인가 참말을 한 것인가? 식인종은 머리 아프게 생겼다. 물론 식인종들이 무식하다는 전제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식인종이 모두 무식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내가 아는 지식의 수준에서 보면 식인종은 그저 배고프면 먹을 뿐이니까. 식인종들은 마냥 우중(愚衆)이 아니다.
이런 예를 두고 이름하여 거짓말쟁이의 이율배반이라고 하는데, 의미론적으로 보면 이는 사실 명제가 될 수 없다.
이런 때 "나는 거짓만을 말한다."라는 발언은 대상언어(對象言語)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대상언어 자체를 메타언어[metalanguage, 고차언어(高次言語)] 차원에서 해석하면 논리적 귀결이 생겨날 수 없다. "'나는 거짓만을 말한다.'라는 그의 말이 진실인가 아닌가?"라고 혹시 물으면 그나마 명제가 성립된다는 말이다. 어떤 말은 더 높은 차원에서 보면 대상이 될 수 있다. 명제는 명제 스스로의 진리를 구하는 게 아니라 명제가 대상으로 하는 사실이나 논리의 참과 거짓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검찰에 묻고 싶다.
지금이라도 "한명숙 전 총리에게 돈을 주었다."라고 하는 대상언어를 메타언어로 오인해 명제로 삼지 말고 "돈을 주었다고 하는 진술을 믿을 수 있을까.", "그는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인가."를 명제로 먼저 고민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미 횡령 사건 등으로 기소된 곽영욱 피고인의 진술과 간접적 증언의 나열만으로는 한명숙 전 총리를 곽영욱과 같은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를 지저분한 사람으로 만들수록, 그의 말 또한 그 신빙성을 점차 잃어갈 것 같지 않은가?
시간이 지날수록 식인종들은 “거짓만을 말한다.”라는 말 자체의 진실을 검증하려고 하기보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식의 고차언어적 차원으로 생각이 변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대한민국 검찰, 어떡하냐? 내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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